[영화 리뷰] 서로의 못난 빈틈을 보듬는 시간,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파반느'



[더인사이트뉴스 허은숙 기자] 최근의 나는 무언가에 온전히 몰입하는 법을 잊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스마트폰 알림을 확인하고, 그렇지 않으면 디지털 포인트를 쌓는 기계적인 일상. 하지만 파반느는 그런 나의 분주한 손가락을 멈추게 했다. 


밤 10시를 알리는 타종 소리와 함께 식당 출입문의 발이 '촤라락' 소리를 내며 걷히고 남자가 성큼 걸어 들어오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나는 직감했다. '아, 이거 범상치 않다'. 기다린 듯 음식을 내어주고 수줍게 사과를 건네는 여배우의 미세한 떨림. 별다른 대사 없이도 오직 감각적인 연출과 두 배우의 표정만으로 사랑이 시작되는 찰나를 그려내는 그 농밀한 공기에 나는 압도당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사랑이 떠나가는 모습조차 지독히도 닮은 온도로 그려내는 것을 보며 결국 나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화면을 되감아 제대로 이 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영화 파반느는 저마다의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청춘들의 초상을 그린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외모, 텅빈 내면을 채우지 못하는 고독, 그리고 상처받은 영혼들이 서로의 빈틈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는 과정은 지독히도 아련하다. 영화는 그들이 상처를 치유한다고 단정 짓지 않는다. 그저 서로의 존재로 인해 잠시나마 숨을 쉴 수 있는 '찰나의 행복'을 시각적 서정성으로 담아낼 뿐이다.


이 시각적 아름다움은 이내 마음속에 깊게 고이는 청각적 잔상으로 이어진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파반느(Pavane)'는 16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장중하고 느린 춤곡을 뜻한다. 이 리듬감은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영화 곳곳에서 흐르는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우아하면서도 서글픈 정조를 자아내며, 인물들이 느끼는 상실감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대변한다. 특히 좁은 공간 속에서 흐르는 팽팽하고도 간지러운 공기는 비포선라이즈의 청취실 장면처럼, 백 마디 대사보다 더 밀도 높은 음악적 서사를 완성하며 영화가 끝난 뒤에도 긴 여운을 남긴다.


그 밀도 높은 공기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내가 흠모했던 영화들의 흔적도 반가웠다. 거울 앞에서 외출 채비를 하며 단장하는 경록아빠에게선 화양연화 속 양조위가, 수신인조차 달가워하지 않는 전화를 끊임없이 돌리는 외로운 요한의 모습에선 중경삼림 속 금성무의 쓸쓸함이 겹쳐 보였다. 누군가에게 닿고 싶지만 끝내 겉돌 수밖에 없는 청춘의 파편들이 왕가위식 미학의 문법으로 재해석된듯해 반가우면서도 애틋했다.


그리고, 영화 전체의 내레이션은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하룻밤(Dogfight)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20년 전 이 영화를 보고 비포선라이즈가 생각난다고 리뷰했던 기억이 이번 파반느를 통해 다시금 선명해졌다. 상처 입은 이들이 하룻밤의 동행을 통해 서로의 가장 못난 부분까지 보듬어 안던 그 시절의 정서는,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위로의 본질을 관객에게 건넨다.


결국 이 영화는 디지털의 휘발적인 속도감에 익숙해진 나에게 '잠시 멈취서서 서로의 결핍을 응시하는 시간'을 잠시나마 선사해준것 같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그들의 파반느에 기꺼이 발을 맞췄던 이 시간은, 영화 속 인물들이 나누었던 찰나의 눈부심만큼이나 나에게도 퍽 다정하고 고귀한 경험으로 남을 듯 하다. 


감독 : 이종필

주연 : 고아성 변요한 문상민

출시일 : 2026.02.20.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드라마, 멜로/로맨스

국가 : 대한민국

러닝타임 : 113분

원작 : 소설<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채널 : NETFL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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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6.02.22 11:29 수정 2026.02.23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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